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주 4.3사건 (문단 편집) == 사건 개요 == ||'''제주4·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'''[br] '''제2조(정의)''' 이 법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. <개정 2007.1.24>[br] 1. "제주4·3사건"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'''희생'''당한 사건을 말한다.|| >'''제주도 역사상 최대의 비극''' [[1948년]] [[4월 3일]]부터 [[1954년]] [[9월 21일]]까지 [[제주도]]에서 일어난 [[양민학살]]로, [[일본제국]]의 패망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[[남로당]]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, 경찰간의 충돌 과정과, 이승만 정권 이후 초토화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.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단독으로 무장대 조직, 기습에서부터 시작되어 제주 4.3 사건이라고 불리지만 그 날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. 말하자면, '''1947년 3월 1일부터 [[한국전쟁]]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된,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'''로 [[보도연맹 학살사건]]과 더불어 [[양민학살]]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. 오늘날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사람들 사이에서는 '제주4.3남한단독정부수립반대 및 남한적화기도 무장반란폭동'이라고 봐야 한다고도 한다. 애꿎은 시민들이 도중에 죽어나가기는 했지만 처음 말단이 된 사건을 일으킨 주체는 엄연히 [[남로당]] 제주도당에서 일으킨것이기 때문이다. 그러나 맨 위 특별법에서도 명시되어 있듯 이 사건의 문제이자 요지는 4월 3일에 일어난 봉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한다.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이 사람들이 지지하는 서북청년단이 관여했음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. 4.3 사건 당시 가장 희생자가 많은 게 계엄령 이후에 벌인 초토화 작전이다. 이 작전은 '''빨치산과 충돌이 없던 장소에서도 벌어졌다. 거기다 토벌대는 빨치산들 있는 산은 안 가고 해변가에서 주둔했다. '''그런 지역 사람들에겐 그냥 뜬금없이 토벌대가 공격한 것 뿐이다. 토벌대가 직접 산속에 깊이 들어간 것이나 초토화작전 중지는 [[유재흥]]장군부터 있던 것이고, [[송요찬]]시절엔 잡으라는 빨치산은 제대로 안 잡고 초토화하는 미친 시절 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